2019.03.10 20:21

향교의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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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의 기능
 
기록에 의하면 향교의 설치는 고려 태조(太祖) 13년(930년) 평양에 향교를 설치하여 6부생(六部生)을 가르치고 문묘를 세워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이 그 직접적인 시초가 된다. 이어 성종(成宗) 6년(987년)에는 전국 12목(양주·광주·충주·청주·공주·진주·상주·전주·나주·승주·해주·황주)에 학교를 설치하고 경학박사(經學博士)를 배치하였으며, 주군(州郡)에 학사(學舍)를 세워 지방교육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이후 인종(仁宗) 5년(1127년)에는 각 주(州)에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진작시킬 것을 명하였으며, 충숙왕(忠肅王) 6년(1314년)에는 이곡(李穀)을 모든 주(州)에 파견하여 향교를 부흥케 하였다. 이에 따라 향교가 각 지방에 널리 설치되고 유교교육의 진작과 지방문화 향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경주향교 전경    
 
그러나 향교의 본격적인 발달과 체제의 완비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이루어진다. 이에 도움을 준 것은 무엇보다도 고려말에 수입되어 조선왕조의 창업이념으로 자리잡게 된 성리학(性理學)이었다. 고려시대에도 유교는 국가이념으로서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명실상부한 것은 아니었다. 

유교보다도 뒤늦게 전래된 불교가 대중 속에 깊숙이 침투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유교는 통치 이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양상이 상당 기간 동안 지속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같은 상황 속에서 고려 말 안유(安裕) 등의 학자에 의해 수입된 성리학은 유교의 활성화와 대중화를 촉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유교 부흥을 위한 두 가지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하나는 불교에 대한 배척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유교의 대중화였다. 이는 조선의 개국과 동시에 조선왕조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유교의 대중화를 위한 교육이 강조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태조(太祖)는 즉위 원년(1392년)에 각 도의 안찰사에게 명하여 학교의 흥폐(興廢)로 그 지역 수령의 능력을 가늠하는 제도를 수립하고 향교 설치를 강조하였다. 이어 태조 7년(1398년)에는 한양에 성균관을 건립하고 더불어 성균관과 병행할 지방교육기구로서 향교의 설치를 재차 촉구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주현(州縣)의 실정에 따라 크고 작은 차이가 있었다. 태조의 교육정책을 이어받은 태종(太宗)은 향교의 수학(修學) 성과를 수령에 대한 평가기준으로 삼고 13년(1413년)에 각 향교의 관리 및 유지에 충당할 비용을 마련토록 학전(學田)을 지급하는 등 더욱 강력한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이에 따라 전국의 행정단위마다 고루 1개소씩 향교가 설치되어 전국의 향교는 모두 360개로 늘어나 명실공히 지방 교육기관으로서의 그 체제와 규모 및 기능을 완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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