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國十八賢-13 문원공 김장생(文元公 金長生, 1548 - 1631)
동벽배향(東壁配享) 제7위(第七位)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김장생은 여러 차례 벼슬을 받기는 하였으나 나아가려 하지 않았고 또 나아가도 오래지 않아 사직하여 낙향하곤 했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에는 서인의 영수 격으로 그 영향력은 매우 컸다. 그는 향리에서 줄곧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고, 이에 그의 문하에는 송시열, 송준길, 장유, 최명길 등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김장생의 스승으로는 이이, 송익필, 성혼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예학에 대해서는 송익필에게 영향 받은바가 크다. 그는 예학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김집에게 전수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가 되었으니, 예를 학문적 연구대상으로 격상시켜 독립된 학문으로 체계화시킨 것이다. 조선의 오현중 예의 대표자로 손꼽히는데, '동방예가의 대성자'로 칭송되듯 그의 학문에서도 예학이 가장 월등하다 하겠다. 이이와 성혼을 배향하는 서원을 세웠고, 1만 8천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짓기도 했다. 그리고 이이가 집필하다 마치지 못한 『소학집주(小學集註)』를 완성하여 발문을 부쳤다.
그는 많은 저술을 하였는데 중요한 것으로 『경서변의(經書辯意)』,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가례집람(家禮集覽)』, 『전례문답(典禮問答)』 등을 들 수 있다. 인조 14년(1636)에 이조판서를 증하고 효종 8년(1657)에 문원이라 증시하였으며, 숙종 43년(1717)에 다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돈암서원(遯巖書院), 도기서원(道基書院)등 10여 개 서원에 제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