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成至聖 文宣王 孔子
B.C 551-479, 중국 춘추시대 말기의 대 사상가이며 교육자로 유교의 개조(開祖)시며 성인으로 일컬어진다.
공(孔)은 성이고 자(子)는 남자의 미칭(美稱)으로 '선생' 의 뜻이며,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노나라 창평향 추읍(지금의 산동성 곡부현 남쪽 추현)출신. 탄생 연도에 대해서는 기원전 551년(주왕실 영왕21년, 노양공22년)이라는 설(사마천의 『사기』[공자세가])과 552년이라는 설(『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이 있다.
아버지는 숙량흘(叔梁紇), 어머니는 안징재(顔徵在)이다. 숙량흘은 60세가 넘어 젊은 안징재와의 사이에서 공자를 낳은 것이라고 한다. 안징재는 공자를 낳기 위해서 니구산(尼丘山)에 기도를 들였다 하는데, 공자의 이름이 구(丘)이고 자가 중니(仲尼)인 것도 니구산과의 관계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혹은 나면서부터 머리꼭대기 가운데가 움푹 들어가 언덕처럼 생겼으므로 이름을 구라고 했다고도 한다(『사기』)
공자의 조상은 은(殷)왕실과 줄이 닿아있다. 즉, 은나라가 망한 뒤 주공은 은나라 최후의 임금인 주왕(紂王)의 서형(庶兄) 미자계(微子啓)를 송(宋)나라에 봉했다. 송나라는 제 6대 양공희에 와서 조카인 여공에게 죽임을 당하고 왕위를 빼앗겼는데, 양공희에게는 이때 아들 불보하(弗父何)가 있었다. 그가 공자의 조상이다. 그 뒤로 송나라의 10대 대공(戴公)에서 무공(武公) , 선공(宣公)에 걸쳐 임금을 보좌한 재상 정고보(正考父)가 있으나, 그 아들 공보가 (孔父嘉)가 송나라의 정쟁에 휘말렸고(B.C 710)다시 그의 아들 자목금보(子木金父)는 송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옮겨와 살게되었다. 그리고 공보가의 '공'자를 따서 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이 자목금보의 현손이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이며, 숙량흘은 '키가 10척이고 무예와 힘이 뛰어났었다'고 한다. (『공자가어』)
『춘추좌씨전』에는 숙량흘이 전쟁에 나가 무공을 세웠다는 기사가 두 군데(양공10, 17년) 기록되어있다. 공자도 용모나 몸집이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고 한다. 『사기』에는 "키가 9척 6촌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키다리라 부르며 이상하게 생각하였다."라고 하였고, 또 공자가 정(鄭)나라에 가서 제자들과 떨어져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의 모습을 정나라 사람의 입을 빌어 "이마는 요임금 같고 목은 고요같고 어깨는 자산과 같으나, 허리 아래편은 우임금보다 3촌이 모자라며 초상난 집의 개처럼 축 늘어져 있더라."라고 표현하였다. 『공자가어』 [곤서(困書)]에서는 '키는 9척 6촌이며 눈두덩이가 평평하고 긴 눈에 툭 불거진 이마를 지녔다.' 는 형용을 보탰으며, 한 대 공부(孔)의 『공총자』가언에서는 장홍(弘)이 공자의 인상을 표현하여, "눈두덩이가 평평하고 꼬리가 긴 눈과 불거진 이마는 황제(黃帝)의 모습이요, 긴 팔에 거북 같은 등을 하고 9척 6촌의 키를 지니고 있는 것은 탕(湯)임금의 용모이다." 라고 하였다. 이같이 공자는 용모가 비범하였고 체력도 강했다 한다
청소년기
공자의 가계는 훌륭했으나 공자가 태어났을 당시 공자의 집안은 가난하고 보잘 것이 없었다. 더욱이 공자가 세 살 되던 해(B. C 549)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므로 그 뒤로는 더욱 어렵게 살았다. 『논어』 [자한]에는 공자 스스로 "나는 어려서 빈천했기 때문에 천한 일도 많이 할 줄 알게 되었다."라고 말한 기사가 있다. 또한 공자가 24세 때(B. C 528)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때서야 사람들에게 물어 아버지 무덤을 찾아 합장했다고 하였으니(『사기』)공자는 극히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기』 [공자세가]에 "공자는 아이 때 언제나 제기를 벌여놓고 예를 갖추는 소꿉놀이로 장난을 하였다." 라고 한 것을 보면, 젊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공자이지만 비교적 바르고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자는 스스로 "나는 나면서부터 알았던 사람이 아니며, 옛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그것을 배운 사람이다."(『논어』 [술이])라고 말하였으나 실제로 공자가 어떻게 공부를 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논어』 [자장]에서 자공이 공자의 학문방법에 대하여, 어디에서도 배웠으며 일정한 스승이 없었다고 하였으며, [팔일]에는 "공자께서 태묘에 들어가셔서는 매사를 물으셨다." 라고 한 것에서 미루어 보면, 공자는 옛 글뿐만이 아니라 눈에 띄는 모든 일에 대하여 스스로 연구하고 공부해서 견식을 넓혀갔던 듯하다.
『논어』[태백]에서는 증자가 "유능하면서도 무능한 사람에게 묻고 많이 알면서도 적게 아는 사람에게 묻는다."고 말하였듯이, 공자는 실제로 자기만 못한 사람도 찾아가 묻고 공부하였다.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17년 (B. C 525, 공자 27세)의 기록에는 담자(郯子)가 노나라를 방문했을 때 공자는 그가 중국 고대의 관제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가 관제에 대하여 묻고 배웠다. 담자는 노나라보다도 문화정도가 훨씬 낮은 조그만 담나라의 제후였는데도 불구하고 옛 관제에 대하여 아는 것이 많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던 것이다. 이 밖에 『사기』 [공자세가]에는 공자가 사양자(師襄子)에게 가서 금(琴)을 배웠으며, 또 [노장신한열전]에는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예에 대하여 물었다는 기록도 있으며, 『공총자』에는 주나라로 가서 장홍에게서 음악을 공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공자 자신이 만년에 자기 일생의 학문 과정을 회고하면서 "나는 열다섯 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라고 하고 또 "서른 살에는 자립하였다."(『논어』 [위정])라고 하였으니, 그는 열다섯 살에는 이미 유학을 이룩하기 위한 학문의 길을 분명히 자각하고 이를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학문이 서른 살에는 어느 정도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학문은 개인적으로는 인의예지에 바탕하여 개인윤리를 확충해서 이상적 인간형인 군자에 이르는 길을 깨우쳐 주었고, 정치적으로는 요, 순, 우, 탕, 문왕, 무왕의 도를 이어받아 도덕을 기초로 해서 꽃피운 문물제도를 되살려 잘 조화되고 질서 있는 세상을 재현시키는 것이었다. 그 조화와 질서는 예악(禮樂)에 의해서 이룩되는 것이라 가르쳤다.
공자는 19세 때(B. C 533)노나라의 위리(委吏)벼슬을 하였고 그 해에 기관씨 집안 딸에게 장가들어 다음 해에 아들 이(鯉)를 낳았다.(『공자가어』) 위리는 나라 창고의 물건을 관장하는 낮은 관직으로서, 생활을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라는 해설이 있다. 다시 21세에는 승전리(乘田吏:『궐리지연보』에 의거, 『사기』에는 사직리라 하였다)가 되었는데, 역시 나라의 가축을 기르는 낮은 관직이었다. 24세에 어머니 안징재가 돌아가셨다.(『궐리지연보』)
장년기
공자는 스스로 자립하였다고 말한 30대로 접어들면서 학문과 경륜이 더욱 원숙해졌다. 따라서 그때부터는 개인문제나 가정생활의 문제를 벗어나 어지러운 민심을 바로잡고 세상을 구원하는 일로 관심이 옮겨갔다. 따라서 이 무렵부터 그의 명성도 커져서 문하에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공자의 제자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확실하고 빠른 것은 『춘추좌씨전』 소공 20년에 보이는 금장(琴張)이다. 이미 공자가 20대에도 제자를 거느렸을 가능성은 있으나, 본격적인 유가사상을 바탕으로 한 교육은 30대 무렵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노나라의 정치는 이 무렵 더욱 혼란해져 노나라의 정권은 완전히 삼환씨(三桓氏)의 손에서 놀아났다. 그 중에서도 계씨(季氏)의 세력은 더욱 커서 노나라 임금마저도 안중에 두지 않을 정도로 방자했었다. 노나라 군대를 모두 자신들의 사병화 했으며, 경제적으로는 자신들의 채읍을 넓히고 많은 가신을 두고 나라의 재물을 멋대로 좌우하였다. 이러던 중 공자가 35세 되던 해(소공 25년) 공자로서는 그대로 보아 넘길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곧 계평자의 방자함을 참지 못한 소공이 후씨와 합세하여 무력으로 계씨를 제거하려다가 삼환씨가 합세하여 반격하는 바람에 경우 목숨만 건져 제나라로 도망한 것이다.
제나라에서는 소공을 도와 다시 노나라로 돌아가게 해 주려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결국 소공은 7년 동안 타국에서 산 뒤 객사하고 말았다. 공자는 이런 극도의 비리를 보고 노나라에서는 자신의 정치이념을 실현할 길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같은 해 소공이 망명한 제나라로 갔다. 제나라로 가서의 행적은 확실하지 않으나 『사기』[공자세가]의 기록에 의하면 공자는 제나라로 가서 대부 고소자(高昭子)의 가신이 되어 고소자의 힘을 빌어 경공(景公)을 만났다. 이 때 경공은 공자의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공자에게 니계(尼谿)의 땅을 떼어주고 중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의 반대로 결국 경공은 등용을 포기하였다. 그래서 공자는 37세 되던 해(B. C 515) 겨울에 다시 노나라로 돌아왔다(여기에는 이설이 많다)
공자는 제나라를 여행하면서 제나라의 음악 책임자인 태사를 만나 음악을 논하기도 하고, 순임금의 음악인 소를 듣고 크게 감동하기도 하는 등 음악 공부에 대하여 이해를 넓히는데 성과를 얻었다.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온 뒤 노나라의 정치는 더욱 어지러워졌다. 공자가 42세 되던 해에는 노나라 소공이 제나라에서 객사하여 정공이 그 뒤를 이었으나, 정공은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또한 노나라 권세가인 계씨 집안도 질서가 어지러워져 실제로는 계씨의 가신인 양호(陽虎:『논어』에서는 양화(陽貨)가 권력을 잡고 있었다. 특히 계평자가 죽은 뒤로 모든 권력은 완전히 양호에게로 돌아갔다. 『논어』[양화]를 보면, 양호는 권력을 잡은 뒤 공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 뒤 정공 8년에 계씨의 또 다른 가신인 공산불뉴(公山不狃)가 양호를 충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때 계평자의 뒤를 이은 계환자가 계략을 써서 이들을 쳐부수었다. 공자는 이러한 혼탁 속에서도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더욱 분발하여 자신의 학문을 닦는 한편 제자들의 교육에 힘을 쏟았다. 이러한 노력 때문에 이 무렵에는 공자의 명성도 더욱 커졌고 먼 곳으로부터도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계환자가 양호를 몰아낸 다음해(공자 51세) 공자는 노나라의 중도재(中都宰)라는 벼슬에 올랐다. 중도재란 중도를 다스리는 장관으로, 공자가 그 벼슬을 맡은 지 일년만에 중도는 다른 고을이 모두 본받을 정도로 질서가 잡히고(『사기』) 예의와 윤리의 기틀이 잡혔다(『공자가어』)
다음해인 노나라 정공 10년(공자 52세)에 노나라 정공과 제나라 경공이 화평을 위해 협곡에서 회합을 하였는데, 이때 공자가 예를 돌보는 관리로 정공을 수행하였다. 여기서 공자는 정공과 경공의 사이에서 외교상의 공로를 세움으로써, 제나라는 노나라의 영지였던 세 고을을 다시 노나라에게 돌려주고 화해를 하게 되었다. 이로써 공자는 다음해 곧 육경의 하나로 국토를 관장하는 벼슬인 사공에 임명되고, 다시 다음 해에는 나라의 법을 다스리는 벼슬인 사구에 임명되었다. 공자는 사구에 임명되자 곧 삼환씨의 세력을 누르고 노나라 공실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삼환씨의 세 고을을 허물기로 하였다. 세 고을이란 계손씨의 비(費), 숙손씨의 후, 맹손씨의 성(成)으로서 이 세 고을을 헐어 없앤다는 것은 노나라 임금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군사적 통일의 회복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계획은 숙손씨와 계손씨에게서는 이루어졌으나 맹손씨에게서는 그 가신의 반대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 밖에도 공자는 나라의 정치를 어지럽히던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처단하기도 하였다. 공자는 굳은 신념과 올바른 판단을 바탕으로 사구의 직책을 수행하여 명성이 국내외에 높아졌다. 그 때문에 다시 다음 해에는 사구에 재상의 일까지 겸임하였다. 이러한 공자의 혁신정치가 효력을 나타내자 이웃한 제나라에서는 크게 경계하고 공자를 제거할 계책을 꾸민 끝에 결국 벼슬자리에서 떠나도록 만들었다. 곧, 제나라에서는 정공과 계환자에게 악무에 능한 미녀 80명과 좋은 말 120필을 선물로 보냄으로써, 정공 등이 즐김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법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자행하도록 하였다. 공자는 이를 말리다가 결국 벼슬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주유열국
모든 벼슬을 버린 다음해인 B. C 497년(노 정공 13년 공자 55세)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나라와 임금을 찾아서 국외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 뒤 B. C 481년(노 애공 11년, 공자 68세)노나라로 되돌아오기까지 13년 동안 공자는 여러 나라의 임금들과 만나 도덕정치의 이념으로 설득을 하였다.(『사기』의 [십이제후연표]에는 공자가 70여 나라를 돌아다녔다고 했으나 공자가 방문했던 나라 수에 대하여는 학자들 사이에 여러 의견이 있다.) 그런데 어지러운 천하를 바로잡으려는 이 긴 여정에서 공자는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곧, 위(衛)나라를 떠나 진(陳)나라로 가다가 광(匡)땅에서 양호로 오인 받아 그곳 사람들에게 위협을 받았으며, 두 번째로는 위(衛)나라를 떠나 조(曹)나라를 거쳐 다시 진나라에 가려고 송나라를 지나다 송나라의 대장군 사마환퇴가 공자를 죽이려한 일을 겪었다. 세 번째로는 진나라에서 삼년 가량 머물다가 다시 위나라로 돌아가려고 광땅 근처의 포 지역을 지나다가 포땅 사람들의 방해를 받았다. 또한 공자가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다가 초나라 소왕이 공자를 초빙하였을 때, 진나라와 채나라에서는 공자가 강한 초나라로 가게 되면 큰일이라고 생각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공자의 가는 길을 막았다. 그 때문에 공자 일행은 꼼짝도 못하게 된 채 양식도 떨어지고 병든 제자가 생기는 등 고생을 겪었다.
이렇게 공자의 13년간의 주유는 수많은 고난이 뒤따랐으나 한편으로는 이미 이론과 실천을 겸한 정치가로서 명성이 높았고, 뛰어난 학문과 심오한 사상으로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는 처지였으므로 찾아간 곳마다 상당한 대우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난세의 사람들은 공자의 사상에 한결같이 공감하고 찬동은 하면서도 도덕을 바탕으로 한 이상사회 건설에 발벗고 나서는 군왕은 없었다. 공자의 이상 실현을 위한 노력은 결국 당세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진나라를 방문한 뒤에는 스스로 탄식하면서 노나라로 돌아갈 뜻을 비추었다. 결국 B. C 484년(노 애공11년, 공자68세), 계강자의 초청을 계기로 공자는 위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왔다.
만년
노나라로 돌아온 공자는 국로(國老)의 대우를 받으면서 국정의 자문에 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힘을 기울인 것은 전적(典籍)의 편찬과 제자 교육이었다. 당시의 제자들은 염유를 비롯하여 자공, 자로, 자유, 자하, 재여, 등이 각기 정치에 참여하여 중요한 벼슬을 하고있었다. 이로 보아 공자의 학문은 노나라뿐만 아니라 가까운 외국에까지도 상당한 세력으로 퍼져나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의 이상이 실현된다는 것은 요원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고 그 이상을 후세에 전해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공자는 먼저 후세에 전할 전적으로서 육경을 편정하고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이상을 후세 사람들에게 교육하려하였다.
육경이란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악경』 『춘추』의 여섯 가지 유가의 기본 경전을 말한다. 이들 육경은 앞서간 사람들의 정치, 사회, 문화, 사상, 생활 등에 관한 여러 가지 지식을 획득하는 한편 올바른 성정을 닦고 인격을 수양하는데 큰 무게를 두었던 유가의 기본 경전이다. 공자의 교육은 비교적 성공적이어서, '제자가 삼천명'(『사기』[공자세가])이라 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때 제자들 중에는 뛰어난 인재들이 많아 노나라를 중심으로 하여 그 밖의 여러 나라에서도 눈부신 활약을 했으므로 스승인 공자도 높은 명성과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불행이 거듭되었다. 69세 되던 해 외아들 리(鯉, 자는 백어(伯魚))가 50세의 나이로 먼저 죽었으며, 다음 해에는 공자가 가장 사랑하고 기대를 걸었던 제자 안연이 죽었다.
공자는 이때, "아!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噫 天喪予 天喪予:『논어』[선진])!" 라고 통곡하였다. 공자에게 안연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으며 절망에 가까운 슬픔을 안겨주었다. 다시 그 다음 해인 B. C 481년(노 애공 14년, 공자 71세 때) 노나라 서쪽에서 기린이 잡혔다 기린은 예로부터 어진 짐승으로서 훌륭한 임금에 의해 올바른 정치가 행해지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난세에 잘못 나와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잡힌 기린을 보고, 공자는 자신의 운명과 비춰서 슬퍼하였으며, 『춘추』의 저술도 이 '서수획린(西狩獲麟)에서 끝맺고 있다.
그 다음 해(공자 72세)에는 오랜 제자로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던 자로가 위나라에서 벼슬하다가 그곳 내란에 휩쓸려 비명으로 갔다. 이러한 겹친 불행을 겪고서 B. C 479년(노 애공16년 공자 73세) 4월 기축일 공자는 일생을 마쳤다. 공자가 서거하자 노나라 애공도 공자의 그 높은 덕을 추모하는 뇌문(誄文)을 지어보냈다.(『사기』) 『예기』 [단궁]을 보면, 공자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 칠일 전에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곧 공자는 아침 일찍 일어나 뒷짐을 지고 지팡이를 끌고 문 앞을 거닐면서 "태산이 무너지려는도다, 들보가 부러지려는도다, 철인이 시드려는도다!"라고 읊었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칠일 후에 돌아가셨다고 쓰여있다. 노나라 성 북쪽의 사상(泗上)에 장사지냈는데, 오늘날 이곳을 공림이라 부른다.
공자는 만년에 일생의 학문 과정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나는 열 다섯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자립하였으며, 마흔 살에는 미혹되지 않게 되었고, 쉰 살에는 천명을 알게 되었으며, 예순 살에는 귀로 듣는 대로 모든 것을 순조롭게 이해하게 되었고, 일흔 살에는 마음 내키는 대로 좇아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게 되었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논어』 [위정])." 칠십 세에 이르러 도달한 경지는 바로 성인의 경지이다. 공자는 칠십 평생 끊임없는 학구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드디어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공자의 제자들
『사기』 [공자세가]에는 공자의 제자 수가 3천명이었는데, 그 중 육예(六藝)에 통달한 사람이 72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같은 책의 [중니제자열전]에는 공자로부터 학문을 전수 받아 이에 통달한 제자가 77명이었다고 하였다. 이밖에 『맹자』 [공손추], 『대대례』 [위장군문자], 『회남자』 [요략], 『한서』 [예문지] 등에 모두 공자의 제자 수를 70명이라 하고 있다.
『사기』 [중니제자열전]이나 『공자가어』 [제자해] 등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이들은 모두 80명 정도이다. 『논어』 에는 27명의 이름이 보이는데, [선진]에는 이른바 공문 사과(孔門四科)의 십철(十哲)로서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 재여, 자공, 염유, 자로, 자유, 자하를 들었다. 공자는 하은주 삼대의 문물제도를 집대성하고 체계화해서 유교사상을 확립시켰다. 그는 어릴 적부터 부지런히 배우고 낱낱이 익혀 드디어는 인사백반(人事百般)에서 우주진리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내 몸을 닦아 남을 편안히 한다(수기안인:修己安人)는 신념으로 정치에 뜻을 두었으나 결국 이상을 실현하지 못했으며, 만년에 조국 노나라로 돌아온 이후에는 『시경』 『서경』 『역경』등 전적 편찬과 제자 교육에 열중하였다. 그를 만세의 스승이라고 일컫는 것은 교육자로서의 위대성을 기리는 동시에 그가 남긴 가르침이 실천 도덕에 바탕을 둔 인류의 영원한 생활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공자는 인의 실천에 바탕을 둔 개인적 인격의 완성과 예로 표현되는 사회 질서의 확립을 강조했으며 궁극적으로는 도덕적 이상국가를 지상에 건설하는 것이 목표였다. 만년에 공들여 육경을 편정한 것은 후세에 그의 이상을 전하고 이를 실현하려는 노력이었으며 3천여의 제자를 가르친 것 또한 지칠 줄 모르는 인간애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경험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단정하기를 꺼린 공자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그의 사상 또한 실천을 전제로 한 도덕이 핵심을 이루고 있고 교육 방법도 현실적인 가치체계를 중요시하였다. 그의 교과목은 예악사어서수등 육예로서, 이 육예에 통달해야 군자라 할 수 있고 완인(完人) 전인(全人)이라 할 수 있었으며, 제자 중에는 72명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공자의 이상과 사상은 『논어』에 그대로 표현되어있다.
공자의 가르침은 그의 생시에는 실행되지 못하였고, 사후에 제자들이 각지에 전파하였으나 제자백가가 일어남에 따라 교세가 약해졌다. 이를 다시 일으킨 이는 맹자였으며, 또 전국시대 말기에 순자도 이를 계승하였다. 그후 한 나라의 무제가 유교를 국교화함으로써 공자의 지위는 부동의 것이 되었고 이후 2천여 년 간 동양의 사상계를 이끌어왔다. 후세의 제왕들도 공자의 봉작을 계속 높여, 왕(王)과 성(聖)의 칭호로 올림으로써 지극히 존숭받게 되었으며, 각지에 '공묘(孔廟:文廟)'가 세워져 춘추로 석전을 받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陰 2·8上丁日에 봉행되어 오다가 최근에 양력5월 11일(돌아가신 날)과 9월 28일(태어나신 날)에 성균관과 전국의 향교에서 석전을 봉행했으나 다시 2·8上丁日에 봉행되고있다. 한편 공자의 후예는 중국에서 연성공(衍聖公)에 봉해져 세전(世傳)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