孔門十哲-1 비공민손(費公閔損, BC 536 - BC 487)|
동무(東무) 동배향(東配享) 제1위(第一位)
춘추 말엽의 노나라 사람인 민손은 자가 자건(子騫)으로 공자보다 15세가 적은 공자의 제자이다. 출신이 빈한하였으며 생모가 일찍 죽고 아버지가 재취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계모는 민손을 심하게 학대하였다. 집안 사정이 매우 어려웠던 관계로 민손은 어리지만 직접 수레나 마차를 끌면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중년에 아버지가 죽어 삼년상을 치르는 중에 노국에 전란이 일어나자 그는 상복 대신 군복을 입고 복역했으며, 그 일이 끝나자 다시 돌아와 삼년상을 마쳤다. 계씨(季氏)가 그를 비읍(費邑)의 재상으로 삼았으나 사양하고 평생 벼슬하지 않다가 나이 50세가 되어죽었다.
민손의 사람됨은 공근단정(恭謹端整)하였으며 침정(沈靜)하여 말이 없었다. 공자는 민손의 모습을 "온화하도다(誾誾如也)" 라고 하였다. 또 노나라 사람이 장부라는 창고를 개수하자 민자건이 "옛 것을 그대로 이용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필이면 반드시 고쳐 지어야만 하는가?"라고 하였다. 이 말을 공자가 듣고 "저 사람이 말을 하지 않을지언정 말을 하면 반드시 도리에 맞음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는 민손이 평소에 말은 매우 적게 하지만 일단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면 반드시 사리에 맞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공자가 만년에 제자에 대한 평가에서 덕행(德行)에는 안연(顔淵),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라 하였듯이 최고의 제자인 안연과 같은 반열에 둔 것을 볼 때 그의 덕행을 짐작할 수 있다. 민자건은 덕행뿐만 아니라 효로서도 뛰어나다. 『초학기(初學記)』 권 17에는 "민손과 증삼은 문도 중에서 효로 일컬어짐이 많아서 효를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증삼과 민손을 들지 않음이 없다"라고 되어있다.
당나라 현종 개원8년(720)에 공문십철(孔門十哲)로 열입(列入)되었고 동왕 27년(739)에는 비후(費侯)로 추증되었으며 송나라 진종 대중상부 2년(1009)에 낭야공(瑯 琊公)으로 추봉(追封)되었다. 도종 함순 3년(1267)에 비공으로 개봉(改封)되었는데 명 세종 가정9년(1530)에 선현민자(先賢閔子)로 개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