孔門十哲-4 제공 재여(齊公 宰予, BC 522 - BC 458)
西무 배향(配享) 제2위(第二位)
공자의 제자로 춘추 말엽 노나라 사람이다. 재(宰)씨이고 이름은 여(予)이며 자는 자아(子我)인데, 재아(宰我)로 칭하기도 한다. 노나라 소공 20년에 출생하여 주(周) 정왕(定王) 11년에 졸(卒)하였으며, 공자보다 29세가 적다. 가계와 평생의 사적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사기』에 의하면 그는 공자가 열국을 주유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하였는데 공자는 여러 번 그를 외교 사절로 제나라와 초나라에 파견했다고 한다.
재여는 지혜가 뛰어났고 언변에도 능한 사람이었다. 공자가 그를 언어에 뛰어난 자로 말하였을 뿐만 아니라 맹자와 사마천도 그가 언변에 재능이 있었음을 인정했다. 맹자는 또한 "재아, 자공, 유약은 지혜가 족히 성인을 알만하다"(『맹자』 [공손추상])고 하여 재여의 지혜가 뛰어났음을 말하였다.
재여는 벼슬에 재능이 있는 자로 이름났고 이에 대해 공자로부터 인정도 받았다. 이는 공자가 여러 번 그를 제, 초등의 나라에 외교 사절로 보냈던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인격수양과 학업에는 비교적 나태했기 때문에 공자로부터 여러 번 질책을 받기도 하였다. 즉 재여는 '오제(五帝)의 덕(德)'에 대해 공자에게 질문했다가, 또 낮잠을 자다가 공자한테 질책을 당했으며, 애공의 사(社)에 대한 질문에 답변해 준 것에 대해서도 공자로부터 비평을 받았다. 공자가 비록 여러 차례 재여를 비평하였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공자는 재여를 '언어'에 뛰어난 자로 인정했다. 맹자가 "내(재여)가 부자(夫子)를 관찰하건대 요순(堯舜)보다 훨씬 나으시다"(『맹자』 [공손추상])라고 하였듯이 재여도 공자를 매우 존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여는 당 현종 개원 8년(720)에 공문십철에 열입되었으며, 동왕 27년에 제후(齊侯)로 추봉되었고, 송 진종 대중상부 2년에 임치공(臨淄公)으로 봉해졌으며, 도종 함순 3년(1267)에 다시 제공으로 개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