孔門十哲 -6 서공 염구(徐公 冉求, BC 522 - 489)
서무 배향(配享) 제3위(第三位)
공자 제자로 춘추시대 말엽 노나라 사람이다. 염씨이며 이름은 구(求)이고 자는 자유(子有)인데, 염유( 冉有)로 일컫기도 한다. 노 소공 12년에 출생하였으나 졸년은 자세하지 않으며 공자보다 29세가 적다.
출신은 한미 였으며 중궁, 염우와는 동족이다. 청년시절에 그는 계씨(季氏)의 가신으로 있으면서 공자를 스승으로 받들다가 나중에는 공자를 따라 열국을 주유하였는데, 노 애공(哀公) 5년 가을에 노나라의 집정자였던 계환자(季桓子)가 죽고 계강자(季康子)가 집정하자 공지어(公之魚)의 추천으로 진(陳)나라로부터 노나라로 돌아와 계씨 가족의 총리를 맡았다. 애공 11년에 제나라와 노나라가 교전했는데 이때 염구가 계씨의 장수가 되어 제나라의 진영에 돌입하여 제군을 대파했다. 그 후 염구는 곧바로 계씨 가족의 직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염구는 천성이 활발하고 낙관적이며 솔직하고 숨김이 없었다. 즉 그가 공자를 시종할 때는 화락하고 온아한 얼굴을 하였다. 그리고 학업을 게을리 하여 공자에게 꾸지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역부족(力不足)을 말하여 솔직하고 숨김없는 천성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다재다예(多才多藝)한 사람으로 경제관리에 대한 재능과 군사재간(軍事才幹)이 출중하였다. 계강자가 실시하는 전작제도(田作制度)를 지지하여 세 수입을 증대시키고 계씨를 갑부로 만들기도 하였으며, 계씨의 장수가 되어 제나라의 군사를 대파하기도 하였다.
염구는 정사분야에서 가장 저명한 자였다. 공자는 염구를 정사분야의 제일로 지목했으며, 또 노나라 대부인 맹무백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도 염구의 정치 재간을 칭찬했다. 그러나 그는 인격 수양 면에서 노력한 흔적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그는 공자에게 학업을 비교적 게을리 하면서 역부족을 느낀다고 하였고, 공자도 그의 인덕 수양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 현종 개원 8년(720)에 공문십철에 열입되었고, 개원 27년(739)에는 서후(徐侯)로 추봉되었으며, 송 진종 대중상부 2년(1009)에 다시 팽성공(彭城公)으로 봉해졌는데 도종 함순 3년(1267)에 다시 서공으로 개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