孔門十哲 -7 위공 중유( 衛公 仲由, BC 542 - BC 480)

by jjhyanggyo posted Mar 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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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門十哲 -7 위공 중유( 衛公 仲由, BC 542 - BC 480)

 

동무 배향(配享) 제4위(第四位)

 

 

문묘배향인물.jpg

 


춘추 말엽의 노국인(魯國人)으로 성은 중(仲) 이름이 유(由)이며 자는 자로(子路)이나 계로(季路)로 쓰기도 한다. 출신이 한미 하였으며, 공자보다 9세가 적은 공자의 제자이다.

자로는 젊었을 때 웅계(雄鷄: 용병을 상징하는 수탉 깃으로 장식한 관)를 쓰고 가돈( 猳豚: 용맹을 상징하는 수퇘지 가죽으로된 띠)을 차며 공자를 능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공자가 예를 차려 가르치자 마침내 유자(儒者)로서 자신을 맡겨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공자를 따라 노나라에 있으면서 벼슬을 할 때 계씨의 비읍(費邑)의 재상이 되었으며 뒤에 노나라를 떠나 위(衛)나라에 이르러서는 위국 대부 공리(孔 悝)의 포읍령(蒲邑令)이 되었다. 공자가 14년간의 주유를 마치고 노나라로 돌아올 때에 자로도 함께 돌아왔으나 위국 포읍령의 직책은 버리지 않았다. 노 애공 15년에 위국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몸소 그 난리에 뛰어들어 죽었으니 나이 63세였다. 자로는 위인이 용맹하였으면 의(義)를 숭상하였다. 이는 위나라에 내란이 일어났을 때 직접 말을 몰아가서 싸우다 죽은 일에서도 알 수 있다.

자로는 공자의 가장 가까운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공자의 평에 의하면 정사와 효도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어린 시절에 집이 가난하여 자신은 채소를 먹고 물을 마시면서도 부모를 위하여 백 리 밖에서 쌀을 지고와서 봉양하였다. 장성하여 차츰 귀한 지위에 오르게 되자 깊이 탄식하면서 "슬프도다 가난이여! 살아 계실 적에는 봉양할 길이 없었고 죽어서는 예를 차릴 길이 없구나!" 라고 하였다. 한편 공자가 자로를 "승당(昇堂)은 하였으나 입실은 하지 못했다"고 평한 것에서는 자로의 인덕(仁德)수양이나 학문은 안연등의 여타 제자들에 미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자로는 살신성인하는 의(義)와 용(勇)이 있었으며 말을 하면 반드시 지키는 신의가 있었으며 자신의 잘못을 지적 받으면 기뻐하는 미덕 등을 지녀 후대 사람의 칭송하는 바가 되었다.

당 현종 개원 8년(720)에 공문십철에 열입 시켰고 동왕 27년(739)에는 위후(衛侯)로 증직되었고 송 진종 대중상부 2년(1009)에 하내공(河內公)으로 가봉되었는데 도종 함순 3년(1267)에 위공으로 개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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