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신라 경덕왕(742 - 765) 때의 사람으로 자는 총지(聰智)이다. 설총의 부친은 원효대사이며, 모친은 요석공주이다.
『삼국유사』 [원효불기(元曉不羈)]와 『삼국사기』의 열전에 의하면, 설총은 천성이 명민하고 슬기로웠으며, 나면서부터 도를 깨달아 경서와 역사에 널리 통달했다고 한다. 또한 중국과 외이(外夷)의 각 지방 풍속과 물건 이름 등에도 통달하였고 육경(六經)과 문학을 훈해(訓解)하여 후생을 훈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해서 고려말, 조선 초에 설총의 이두창제설(吏讀創製說)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설총의 출생 이전에 이미 [진흥왕순수비]나 [서동요] [혜성가] [풍요(風謠)]등에 향찰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설총은 이두를 창제한 것이 아니라 집대성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설총은 많은 글을 지었으나 세상에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남쪽에 설총이 지은 비명이 있지만 글자가 결락되어 읽을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이 『삼국사기』 열전에는 신문왕을 풍간(諷諫)한 [화왕계]가 실려 있다. 이 작품은 꽃을 의인화하여 군자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하라는 우언(寓言)으로, 유교주의적 정치윤리를 그 내용으로 담고 있다. 그리고 이 [화왕계]는 내용뿐 아니라 문체 또한 변려문(騈儷文)을 본받은 수준 높은 글로 되어 있어 당시 한문학의 수준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설총은 이두로 유교 경전을 해석하여 후학을 훈도 하였으며, 동시에 우리나라 유학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고려 현존 13년(1022)에 홍유후(弘儒侯)로 추증 되어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