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國十八賢-3. 문성공 안유(文成公 安裕, 1243 - 1306)
동벽배향(東壁配享) 제2위(第二位)
동벽배향(東壁配享) 제2위(第二位)
본관은 순흥이고, 초명은 유(裕)이었으나 나중에 향(珦)으로 고쳤다. 그러나 조선 문종(文宗)의 이름과 같았기에 이를 휘(諱)하여 유로 바꾸었다. 그러나 지금은 원래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자는 사온(士蘊)이며, 호는 회헌(晦軒)으로 남송 주희(朱熹)의 호인 회암(晦庵)을 본뜬 것이다. 고려 순흥 사람이다.
18세 때인 원종 1년(1260)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을 시작으로 벼슬이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에 이르렀다. 안향은 원종 11년(1270) 삼별초의 난 때에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하였고, 이를 계기로 원종의 신임을 받게 된다. 그 후 충렬왕 1년(1275)에 상주판관으로 나간 일은 특히 유명한데, 그는 백성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하고, 민풍을 쇄신시켰으며, 유학을 장려하였다. 안향은 왕을 호종하여 여러 차례 원에 다녀왔다. 충렬왕 15년(1289) 11월에는 충렬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그려 돌아왔다. 그 뒤 동왕 22년(1296) 12월에는 자신의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다. 동왕 29년(1303)에는 국학학정 김문정을 중국에 보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및 문묘에 사용할 제기와 육경, 제자, 주자서 등을 구해 오게 한다.
또한 6품 이상의 관리는 은 1근을,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장학재단인 양현고(養賢庫)를 설립하였으며, 충렬왕 30년(1304) 5월에는 섬학전(贍學田)을 마련하여 인재를 기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6월에 대성전이 완성되자 공자와 선성(先聖)의 화상을 모시게 하였다.
충렬왕 32년(1306)안향이 서거한 후, 충숙왕 5년(1318)에 임금의 명으로 그의 화상을 그리게 하였고, 조선 명종때 다시 그의 화상을 그렸으니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충숙왕 6년에 이러한 공로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의 문인으로는 백이정(白頤正), 우탁(禹倬), 권부(權溥)를 들 수 있으며, 백이정의 문인으로 이제현(李齊賢) 등을 들 수 있다.
곧 공민왕의 개혁 정치를 보좌하고 조선을 건국하는 등 격변기의 역사를 이끌어간 무수한 신흥 사대부들은 바로 그의 노력에 의해 배출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은 주자의 백록동 서원을 본떠 백운동 서원을 세워 안향을 제향하였다. 그 후, 명종 4년(1549)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에 의해 '소수서원(紹修書院)' 이라는 명종의 친필 사액(賜額)이 내려졌으니 사액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무덤이 있는 장단의 유생들에 의해 인조 21년(1643)에 세워진 임강서원에 제향되어 있으며, 곡성의 회헌영당에도 제향되어 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