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벽배향(西壁配享) 제2위(第二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본관은 연일(延日), 초명은 몽란(夢蘭)이었으나 몽룡(夢龍)으로 고쳤고, 뒤에 다시 몽주(夢周)로 개명하였다. 고려 연일 사람으로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공민왕 6년(1357)에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공민왕 9년(1357)에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다.
공민왕 16년(1367) 예조정랑 겸 성균관 박사가 되었고, 다시 성균관 사예, 직강, 사성 등을 역임했다. 정도전, 정몽주, 이숭인 김구용 등이 학관이 되어 경학을 강론했는데, 특히 정몽주는 사서삼경에 두루 밝아 이치를 깊이 깨달았다고 평하였으며, 이색 또한 정몽주를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원조로 극찬하였다.
우왕 2년(1376) 정몽주는 성균관 대사성이었는데, 이인임(李仁任)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 정책에 반대하여 언양(彦陽)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당시 권문세족은 그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일본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게 했으나, 정몽주는 오히려 이를 무사히 마치고 잡혀갔던 수백명의 백성을 데리고 온 일이 있었다. 또한 명나라에 여러 차례 사신으로 가서, 명과의 국교관계를 회복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종군할 때에는 이성계와 함께 여진족을 토벌하였으며, 창왕 1년(1389)에는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영립(迎立)하였다.
정몽주는 성리학을 진흥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당시 불교의 의식에 따라 상제(喪祭)를 치렀지만 그는 사서(士庶)에게 『가례(家禮)』에 따라 사당을 세우게 하였으며, 서울에 오부학당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교육을 진흥 시켰다.
정몽주는 고려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정몽주가 고려 왕실을 존속시키려는 온건개혁파의 입장이었음에 반해, 이성계는 고려 왕실을 폐지하려는 역성혁명파였다. 결국 이성계를 제거하려 하던 정몽주는 이방원(李芳遠)의 문객 조영규에 의해 살해된다.
그 후 태종 5년 권근의 요청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府使 修文殿大提學 監藝文春秋館事 益陽府院君)으로 추증된다. 그리고 중종 12년(1517)에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에 의해 문묘에 배향되었다. 묘의 비석도 이때에 세워졌는데 고려의 벼슬만 쓰고 조선의 추시(追諡)는 쓰지 않아 그가 두 왕조를 섬기지 않았음을 분명히 했다.
태종 원년 신사년(1401)에 영의정에 추증하고 시호를 문충이라 하였고 중종 12년에 문묘에 종사하였다. 숭양서원((崧陽書院)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영모재, 임고서원 등에 그의 초상이 봉안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