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國十八賢-6. 문헌공 정여창(文獻公 鄭汝昌, 1450 - 1504)
서벽배향(西壁配享) 제3위(第三位)
서벽배향(西壁配享) 제3위(第三位)
자는 백욱(伯욱), 호는 일두(一蠧)이며, 본관은 하동이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혼자 독서하다가 김종직의 문하에서 김굉필과 함께 수학하였다.
성종 11년(1480)에 성균관에 유시를 내려 행실을 닦고 경학에 밝은 사람을 구하자 성균관에서 정여창을 천거하였다. 지관사(知館事)였던 서거정(徐居正)이 경연에서 진강하게 하려 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성종 14년(1483)에 성균관 상사(上舍)의 동렬(同列)에서 그를 이학(理學)으로 추천하였으며, 이 해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다. 정여창은 경명행수(經明行修)로 여러 번 천거되기도 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 후 성종 21년(1490)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였고, 그 후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가 되었으나 동궁(연산군)이 좋아하지 않았다.
연산군 1년(1495) 안음현감(安陰縣監)이 되었는데, 당시 정여창은 백성들의 질고가 부렴(賦斂)에 있다고 보고 편의수십조(便宜數十條)를 시행하여 백성으로부터 큰 칭송을 들었다. 그러나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종성(鐘城)에 유배되었으며 그 곳에서 생을 마쳤으며 그 해에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 되었다.
정여창은 성리학의 근원을 연구하여 진일보 시켰다. 그의 학문은 심학(心學)에 근거한 이학(理學)으로 특히 『중용』 『대학』에 정밀하였다. 그는 평생 많은 저술을 하였지만, 모두 소실되었고 『일두유집(一蠧遺集)』 정도가 전한다. 철학사상을 볼 수 있는 주요 논문으로는 [이기설], [선악천리론(善惡天理論)], [입지론(立志論)]등을 들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이기설]에서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으며, [선악천리론]에서는 선악이 모두 천리에서 나온 성이라고 하였고, 또한 기(氣)보다는 이(理)를 중시한 주리론자(主理論者)였다. 정여창은 입지를 중시하여, [입지론]에서는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막아야한다"고 역설하였다.
중종반정 이후 사림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광해군 2년(1610)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경현서원(景賢書院), 도남서원(道南書院), 남계서원(南溪書院), 도산서원(陶山書院), 이연서원(伊淵書院),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일두유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