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벽배향(東壁配享) 제4위(第四位)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개국공신 온(溫)의 5세손으로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조광조의 개혁사상은 지치주의(至治主義: 유학의 이념에 의해 천리가 구현된 이상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한 정치이념이자 실천운동)에 입각한 왕도정치(王道政治)라 할 수 있다. 조광조는 중종 12년(1517) 정 5품인 교리(校理)로서 경연시독관(經筵試讀官)과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하면서,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배경으로 개혁 작업을 실행한다. 그 첫 번째 작업은 바로 향약보급운동이라 할 수 있는 '여씨향약(呂氏鄕約)'을 8도에 실시하는 것이다. 이는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향촌에 구현하고 동시에 향촌은 사림파가 장악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사장(詞章) 중심의 학풍을 변화시킴은 물론, 『가례(家禮)』의 보급으로 조선의 풍습을 일변시켰다. 동왕 13년(1518)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소격서(昭格署)를 폐지시켰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종 2품인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올라 사실상 모든 실권을 장악한다. 두 번째 개혁 작업은 현량과(賢良科)의 도입을 들 수 있다. 인재를 과거제도가 아닌 천거로 등용하는 제도로, 이를 통해 사림의 세력이 확대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조광조는 이러한 사림 세력을 배경으로 중종 14년(1519)에 훈구세력인 반정공신(反正功臣)을 공격한다. 그는 반정공신의 수를 줄여야 한다며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주장하였고, 이로 인해 공신의 3/4에 해당하는 76인이 훈작을 삭탈 당하게 된다. 결국 사림파의 독주에 불만을 느낀 중종은 훈구파의 탄핵을 받아들여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고, 조광조는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당시 조광조가 옥에 갇히자 성균관 유생을 비롯한 1천여 명의 유생들이 광화문에 모여 항의 시위를 하기도 했다. 조광조의 실패에 대해, 이황과 이이는 나라 다스릴 재주는 타고났으나 학문이 이루어지기 전에 정계에 나아갔기 때문이라고 평하였다.
선조 즉위년(1567)에 사림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자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하였으며, 광해군 2년(1610) 문묘에 종사되었다. 죽수서원(竹樹書院), 양현사(兩賢司), 심곡서원(深谷書院)등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정암집(靜庵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