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國十八賢-8. 문원공 이언적(文元公 李彦迪, 1491 - 1553)
서벽배향(西壁配享) 제4위(第四位)
서벽배향(西壁配享) 제4위(第四位)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 본관은 여주(驪州)이다. 초명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게 되었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했다. 중종 25년(1530) 사간이 되어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자 경주 자옥산(紫玉山)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그 뒤 중종 32년(1537) 김안로가 몰락하자 다시 벼슬길에 올라 좌찬성(左贊成)에까지 이르렀다.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가 일어나자 추관(推官)이 되었으나, 사림의 문초에 소극적으로 임한 이유로 파직되었다. 그 후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 1547)에 연루되어 강계(江界)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하다 명종 8년(1553)에 생을 마쳤다.
이언적은 조선조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니, 바로 주희(朱熹)의 주리론(主理論)을 조선조 정통 유학의 흐름으로 정립시킨 것이 그것이다. 이언적의 이러한 학문은 스승에게 전수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독자적인 학문을 수립한 것이다. 다만 호가 '회재(晦齋)'인 점에서 회암(晦庵: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르려 한 점을 알 수 있다. 이언적은 27세(1517)에 조선조 성리학사상 최초의 본격적 논쟁이라 할 수 있는 태극(太極)에 대한 개념 논쟁을 벌이게 된다. 이언적은 영남의 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전개된 무극태극론(無極太極論)에 가세한 것인데, 그는 정통 주자학의 주리론의 입장에서 이기선후설(理氣先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주장하였다. 곧 태극의 이(理)가 기(氣)보다 선행하여 인륜도덕의 근원이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의 견해는 이황에게 전수되어 영남학파 성리설(性理說)의 선구가 된다.
이언적은 만년의 강계에서의 유배생활(1547 - 1553)동안 많은 저술을 하였다.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1549)와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은 비록 주자의 『장구(章句)』와 『혹문(或問)』의 보충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주자와 다른 견해를 여러 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1553)는 주자의 『중용장구』나 『중용혹문』의 체제를 벗어나 구경(九經:『중용』 22장,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 修身, 尊賢, 親親, 敬大臣. 體群臣, 子庶民, 柔遠人, 懷諸侯)을 중심으로 중용을 해석하려는 독창적인 저술이라 할 수 있다. 『구인록(求仁錄)』(1550)에서는 유학의 핵심개념인 '인(仁)'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또 실천 규범인 예(禮)를 제시하였는데, 『봉선잡의(奉先雜儀)』(1550)에서는 유학의 핵심개념인 '인(仁)'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또 실천 규범인 예를 제시하였는데, 『봉선잡의』(1550)는 조선조 후기 예학파의 선구작이라 할 수 있다.
선조 즉위년(1567)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를 문원(文元)이라 하였으며, 광해군 2년(1610)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제향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