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國十八賢-9 문순공 이황(文純公 李滉, 1501 - 1570)
동배향(東配享) 제5위(第五位)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이며, 본관은 진보(眞寶)이다.
60세(1560)에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7년간 기거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68세에는 선조의 명으로 대제학 지경연에 출사하여, 성군이 되기 위해 지켜야 할 조목인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疎)]를 올린다. 그리고 평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리학을 10장의 그림으로 풀이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올린다.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였다 한다.
조선조의 학자들이 성리학을 체계적이고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이황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이황은 특별한 스승이 없이 거의 독학으로 대성하였다. 이황은 중종 38년인 43세 때에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입수하여 풍기군수를 사퇴한 49세 이후에 심독하여 자신의 학문을 완숙시켰으며, 또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53세(1553)에는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개정하였고, 이로 인해 기대승(奇大升)과 7년 여에 걸쳐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이 일어나게 된다. 또한 54세에는 노수신(盧守愼)의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에 대해 논쟁하였다. 57세에는 『역학계몽전의(易學啓蒙傳疑)』를 완성하고, 58세에는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자성록(自省錄)』을 완성하였다. 63세(1563)에는 『송원이학통록(宋元理學通錄)』을 지었고, 66세에는 『심경후론(心經後論)』을 지었으며, 68세에는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완성한다.
이러한 이황의 학문은 후일 영남학파를 형성함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도 전파되어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실로 이황은 동양 삼국의 학자들에 의해, 주자를 이은 최대의 학자로 칭송되며 성인으로까지 일컬어지고 있다. 1970년 서울에 퇴계학 연구원이 창립된 이후, 일본 동경에 이퇴계연구소, 대만 국립사범대학 내에 퇴계학 연구회가 부설되었으며, 근래에는 미국의 워싱톤, 뉴욕, 하와이, 독일의 함부르크, 본에 퇴계학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1976년 이래 해마다 세계 도처에서 국제학술회의가 개최되고 있다.
선조 3년(1570) 영의정에 추증하고 동왕 9년(1576)에 문순(文純)이라 증시(贈諡)하였으며, 광해군 2년(1610)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후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비롯하여 이황을 종사한 서원은 전국에 40여 곳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