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國十八賢-10. 문정공 김인후(文正公 金麟厚, 1510 - 1560)
서배향(西配享) 제5위(第五位)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담재(湛齋)이고, 본관은 울산(蔚山)이며, 대대로 호남의 장성에서 살았다. 부친은 참봉 김령(金齡)이며, 모친은 옥천(玉川) 조씨이다.
열 살 때 김안국(金安國)에게 『소학』을 배웠으며, 중종 26년(1531)에 성균사마시(成均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중종 35년(1540)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고, 그 다음해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중종 38년(1543)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겸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設書) 및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이 되어 세자를 보도(輔導)하였다.
부모 봉양을 위해 옥과 현감으로 나아갔다가 중종이 승하하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그러나 채 1년도 안되어 인종이 승하하고 을사사화(1545)가 일어나자 병을 칭탁하고 낙향하였다. 그 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등에 제수 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김인후는 인종을 지극히 사모하여 매년 인종의 기일인 7월 1일이 되면 집 남쪽 산골짜기에서 밤새도록 통곡을 하고 돌아왔다 한다.
김인후는 조예가 초월하고 기상이 호매하여 도학, 절의, 문장을 겸비한 대표적인 학자로 손꼽히는데, 도학(道學)에 관한 저술보다는 시문집을 더 많이 남겼다. 그러나 그의 성리학적 성과는 유학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도학에 정통한 호남의 거유를 뽑자면 당연 김인후를 뽑을 수 있다.
김인후는 이항(李恒)과 기대승(奇大升)이 태극음양설(太極陰陽說)에 대해 논쟁을 벌이자, 기대승의 설에 동조하였으며, 이로 인해 기대승이 주정론(主情論)을 세우는 데 중요한 일조를 하게 된다. 또한 노수신의 [숙흥야매잠해]에 대해서도 논쟁을 벌였는데, 이황은 김인후의 뛰어난 견해에 미칠 수가 없다며 극찬을 하기도 했다. 이 뿐만 아니라 김인후는 천문, 지리, 의약, 율력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정통하였다.
정조 20년(1796)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되었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大匡輔國 崇祿大夫 領議政 兼 令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司)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저서로는 『하서집』, 『주역관상편』, 『서명사천도(西銘四天圖)』, 『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