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國十八賢-11. 문성공 이이(文成公 李珥, 1536 - 1584)
동벽배향(東壁配享) 제6위(第六位)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부친은 증좌찬성(贈左贊成) 원수(元秀)이며, 모친은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웠고, 명종 3년(1548) 1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侍墓)를 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한 후, 다음해에 다시 유학에 전념하였다. 23세(1558)에 이황(李滉)을 방문하고, 그해 겨울에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한 후, 전후 아홉 번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려졌다. 29세에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처음 벼슬을 시작하여 우찬성(右贊成)에까지 이르렀다.
이이는 4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자신의 사상을 정치에 적극적으로 실천하려 하였을 뿐더러 학문적으로도 큰 업적을 이루었다. 이이는 19세부터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교류해 왔는데, 37세(1572)에 이르러 성리설에 대한 본격적인 논쟁이 이루어진다. 성혼은 기대승과 이항 사이에서 벌어진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에 있어서 이황의 설을 따르려고 하였다. 성혼은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이이에게 물었고 이로 인하여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 논쟁을 두 사람의 호를 따서 '율우논변(栗牛論辯)' 이라한다. 여기서 이이는 이황과 기대승은 물론, 서경덕, 노수신, 나흠순 등의 논평뿐 아니라 경전의 본의와 송 대 제유(諸儒)의 설을 집약적으로 논술하게 된다. 이이는 이러한 논쟁을 통하여 제유의 설을 비판하였으며, 특히 서경덕의 주기론에 대해서는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주장하고,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대해서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한다. 이 논쟁의 요지는 『성학집요』와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 모두 들어있다.
이황이 이기호발설을 주장하여 주리론적 관점에 서게 되고, 이이는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주기론적 입장에 서게 된다. 이러한 양자의 차이는 정치활동에도 연결된다. 이황의 경우 정치 현실을 떠나 산림에 은거하려 한데 비해, 이이는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에 나섰다. 곧 34세에 올린 현실 개혁에 관한 『동호문답(東湖問答)』이나 39세에 지은 [만언봉사]와 십만양병설과 대동법의 시행 등을 주장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그의 정치사상과 심오한 학문은 많은 저술로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전술한 『동호문답』, [만언봉사] 외에도 40세에 지은 『성학집요』 45세 때 지은 『기자실기(箕子實記)』 47세에 임금의 명으로 지은 [인심도심설]과 이해에 지은 [김시습전]과 [학교모범] 48세 때의 [시무육조]등을 들 수 있다. 이황이 남인 중심의 영남학파를 형성한 데 비하여, 이이는 서인 중심의 기호학파를 형성하여 영남학파와 함께 쌍벽을 이루게 된다.
인조 원년 계해년(1623)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를 문성(文成)이라 하였다. 숙종 7년(1681)에 성환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었으나 동왕 15년(1689) 일시 출향(黜享)되었다가 갑술환국(甲戌換局, 1694) 때에 다시 종사되었다. 자운서원, 송담서원 귀암서원, 운전서원, 백록동서원 등 20여개 서원에 제향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