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國十八賢-12. 문간공 성혼(文簡公 成渾, 1535 - 1598)
서벽배향(西壁配享) 제6위(第六位)
자는 호원, 호는 우계(牛溪), 묵암(默庵), 본관은 창녕 이다.
명종 6년(1551) 생원, 진사 초시에는 모두 합격했으나 복시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명종 9년(1554)에 같은 고을의 이이와 사귀면서 평생의 지기가 되었다. 선조 1년(1568)에는 이황을 만나게 되고, 이후 깊이 존경하게 된다. 같은 해 경기감사 윤현의 천거로 전생서참봉에 봉해졌고, 이후 벼슬이 좌참찬까지 이르렀으나 대부분 사양하거나 부득이 벼슬에 나아가더라도 곧 사퇴하였다. 대신에 [서실의(書室儀)] 22조를 지어 벽에 걸어 놓고 학문과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성혼은 임진왜란 전까지는 임금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이후로 점점 미움을 받았다. 왜란 중 유성룡과 함께 강화를 주장하였는데, 강화를 주장한 이정암의 입장을 옹호하다 선조의 분노를 사자 사직하고 파주로 돌아갔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서인의 영수에 해당하며, 학문적으로는 이이 사후에 사실상 기호학파의 주도자였다. 그러나 성혼은 정치가라기보다 학자에 가까운 인물이라 하겠다. 그는 자신의 학문을 이이와의 토론을 통해 체계화시켰다. 성혼과 이이 사이에 벌어진 인심도심논쟁인 이 '율우논변(1572)'은 성리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논의는 성혼이 기대승과 이황과의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에 있어서 이황의 설을 지지하면서, 이이의 의견을 묻는 것으로 시작되어 1년에 9차례의 서신을 주고받으며 논쟁을 계속하였다.
파주로 돌아간 이후로 성혼은 조정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많은 참소를 당하였으니, 사후에도 기축옥사(己丑獄事, 1602)에 연루되어 관직이 추탈되기까지 하였다. 인조 11년(1633)에 복직되어, 좌의정에 추증되었고 문간이라 시호하였다. 숙종 7년(1681)에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동왕 15년(1689)에 출향 되었다가 갑술환국 때 다시 승무(陞 )되었다. 저서로는 『우계집』과 『주문지결(朱門旨訣)』, 『위학지방(爲學之方)』등이 있다. 죽림서원, 물계서원 파산서원, 운전서원 등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