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國十八賢-13 문원공 김장생(文元公 金長生, 1548 - 1631)
동벽배향(東壁配享) 제7위(第七位)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선조 11년(1578)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이 되었으며, 동왕 14년 부친인 김계휘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왔다. 동왕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조정랑으로 명나라 군사의 군량조달에 많은 공을 세웠다. 동왕 30년(1597)에는 낙향해 있다가 호남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수행하여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이 되었으며, 그 후 안성 군수가 되었다. 계축옥사(癸丑獄事, 1613)때 동생이 관련되었다 하여 연좌되었으나 무혐의로 풀려난 후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 후 원자보도(元子輔導)의 직을 맡기도 하였다. 정묘호란 때 (1627)에는 의병을 모아서 공주로 내려온 세자를 호위하였으며, 이 해에 형조참판이 되었다.
김장생은 여러 차례 벼슬을 받기는 하였으나 나아가려 하지 않았고 또 나아가도 오래지 않아 사직하여 낙향하곤 했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에는 서인의 영수 격으로 그 영향력은 매우 컸다. 그는 향리에서 줄곧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고, 이에 그의 문하에는 송시열, 송준길, 장유, 최명길 등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김장생의 스승으로는 이이, 송익필, 성혼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예학에 대해서는 송익필에게 영향 받은바가 크다. 그는 예학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김집에게 전수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가 되었으니, 예를 학문적 연구대상으로 격상시켜 독립된 학문으로 체계화시킨 것이다. 조선의 오현중 예의 대표자로 손꼽히는데, '동방예가의 대성자'로 칭송되듯 그의 학문에서도 예학이 가장 월등하다 하겠다. 이이와 성혼을 배향하는 서원을 세웠고, 1만 8천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짓기도 했다. 그리고 이이가 집필하다 마치지 못한 『소학집주(小學集註)』를 완성하여 발문을 부쳤다.
그는 많은 저술을 하였는데 중요한 것으로 『경서변의(經書辯意)』,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가례집람(家禮集覽)』, 『전례문답(典禮問答)』 등을 들 수 있다. 인조 14년(1636)에 이조판서를 증하고 효종 8년(1657)에 문원이라 증시하였으며, 숙종 43년(1717)에 다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돈암서원(遯巖書院), 도기서원(道基書院)등 10여 개 서원에 제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