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國十八賢-14. 문렬공 조헌(文烈公 趙憲, 1544 - 1592)
서벽배향(西壁配享) 제7위(第七位)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도원, 후율, 본관은 백천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1,600여명을 모아 8월에 승군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관군에 의해 의병이 강제 해산 당하자, 남은 700명의 군사로 왜병과 금산에서 전투중 전사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조헌은 고경명, 김천일 곽재우 등과 함께 임진 4충신으로 추앙 받고 있다. 그의 생애로 미루어 보면, 절의가 매우 뛰어나서 도학적인 면모를 갖추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도학과 절의를 겸비한 이물로 이이와 이지함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조선 중기 개혁론의 기수가 된다. 또한 후에 실학파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선조 7년(1574)에 명나라에 다녀와 올린 『동환봉사(東還封事)』에는 그의 개혁사상이 집약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중국의 선진 문물제도를 따를 것을 건의하면서, 시무에 급한 문제를 다룬 [팔조소]와 위정의 근본이 되는 문제를 다룬[십육조소]등이 실려 있다.
그의 학문은 실천궁행으로 주장을 삼고 거경에 힘써서 근독공부(謹獨工夫)를 꾸준히 하였다. 또한 천문 지리 등에 능통하였으며 경세의 대지가 있었다.
선조 37년(1604)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영조 10년(1734)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고종 20년(1883)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표충사, 문회서원, 우저서원, 상현서원 성곡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1971년 금산의 순절지인 칠백의총이 성역화 되었다. 저서로는 『중봉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