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國十八賢-18. 문순공 박세채(文純公 朴世采, 1631 - 1695)
서벽배향(西壁配享) 제9위(第九位)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 남계(男溪),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그는 명문가에서 태어났는데, 증조부 응복은 대사헌이며, 조부 동량은 형조판서이며, 신흠의 외손이다. 또한 박세당, 박태유, 박태보 등과는 친족간이며, 송시열 의 손자를 사위로 삼았다.
1649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효종 2년(1651)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문제를 두고 영남 유생이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박세채는 이에 대해 이를 비판하는 글을 냈다가 효종의 꾸지람을 듣자,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효종 2년(1651)에 김집에게 수학하였으며, 동왕 10년(1659)에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로 천거되었다. 이해 5월 효종이 승하하고 예송이 일어나자, 송시열의 기년설을 지지하여 관철시켰다. 그러나 2차 예송에서 패하자, 그도 관직을 삭탈당하고 양근, 원주 등지에서 6년간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그 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1680)으로 다시 등용되어 벼슬이 대사헌과 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참찬에 이르렀다. 숙종 10년(1684) 노론과 소론의 대립을 막으려 하였으나, 결국 소론을 지지하게 된다. 동왕 15년(1689)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다시 갑술옥사(1694)이후 좌의정에 올랐으며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에 이이와 성혼의 문묘종사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6년간의 유배생활과 기사환국 이후의 은거 생활을 통해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우선 유배기간 동안에는 여러 경서의 난해한 곳을 풀이한 『독서기(讀書記)』와 『춘추보편(春秋輔編)』을 비롯하여 '경(敬)'에 대한 여러 학자의 설을 정리한 『심학지결(心學至訣)』등을 지었다. 그리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서는 윤증(尹拯), 정제두 등 소론계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이학통록보집(理學通錄補集)』,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 등을 통해 중국과 우리 나라의 도학의 연원을 밝혔으며, 『양명학변(陽明學辨)』 등의 글을 통해 양명학을 비판하여 도통수호에 전력하였다. 또한 그는 예학의 대가로, 『남계선생예설(南溪先生禮說)』, 『육례의집(六禮疑輯)』 등을 통해 오륜의 근거를 밝히고 구체적인 예의 절차까지 탐구하여 예학을 한 차원 격상시켰다. 이에 따라 17세기의 성리학은 예학적 전개 양상을 띠게 된다.
오관서원, 자운서원, 반계서원, 비봉서원, 구봉서원, 문회서원 등에 제향되었으며, 숙종 24년(1698)에 문순이라 증시하였고, 영조 40년(1764)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저서로는 위에서 든 것 외에도 『남계집』, 『가례요해』 『성현유범』 등 수백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