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조6현-2. 예국공 정호(豫國公 程顥, 1032 - 1085)
서무배향(西무配享) 제1위(第1位)
북송 때의 저명한 철학가로 '북송오자'중의 한 사람이며, 송 명리학 창시자 중 한 사람이다. 자는 백순(伯淳)인데 세칭 '명도선생(明道先生)'이라고 하였으며, 하남(河南) 낙양(洛陽)사람으로 송 인종 명도(明道) 원년(1032)에 출생하여 송 신종 원풍 8년(1085)에 졸하였다.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조악(調鄂), 상원(上元)의 주부(主簿)로 발탁되었고, 진성(晉城), 부구(扶溝)의 현령(縣令)을 지냈으며, 후에 여공저(呂公著)의 천거에 의하여 태자중윤(太子中允), 감찰어사이행(監察御史裏行)이 되었다. 젊었을 때 그의 아우 정이(程頤)와 함께 주돈이(周頓頤)에게 배웠으므로 이정(二程)으로 병칭 되었고, 그들이 장기간 낙양에서 강학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학을 낙학(洛學)이라고 하였으며, 송유(宋儒)들은 정호를 공맹의 도(道)를 계승하고 크게 발양한 진유(眞儒)로 여겼다고 한다.
정치적으로는 사마광(司馬光), 소옹(邵雍)과 같은 입장에서 왕안석(王安石)의 신정을 반대했으며, 인종에게 개혁 방안<치법십사(治法十事>를 올려 토지 겸병의 제지와 병역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고 농업 생산을 강조하였다. 철학적으로는 천리를 핵심으로 하는 유심주의의 철학체계를 창립하였는데, 인심(人心)으로부터 출발하여 천리를 해석하여 이(理)와 심(心) 그리고 주관 객관은 융합하여 일체가 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또한 공자의 '인(仁)'의 범위를 확대하여 "인(仁)이란 만물과 혼연하게 한 몸이 되는 것이다"([식인편(識仁篇)]라 하여 인(仁)을 주관과 객관의 상호 융합으로 보았다. 인식 방법으로는 인심(人心)의 자성(自省)과 내구(內求)를 중시하여, "학자는 반드시 멀리서 구하지 말고 가까이 자신에게서 취해야 한다"(『유서』)고 하였다.
정호의 이론과 그의 아우 정이의 학설은 남송의 주희(朱熹)에 의하여 계승 발전되어 송원명청의 통치 사상이 되었으니. 이를 정주학파(程朱學派)로 일컬었다. 저서로는 『정성서(定性書)』, 『식인편(識仁篇)』등이 있으며, 후인들이 그와 정이(程頤)의 저서를 합편한 『이정전서(二程全書)』가 있고, 『이정집(二程集)』이 있다.
송나라 영종이 가정 13년(1220)에 순공(純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종 순우 원년(1241)에 공자의 묘정에 종사되었으며 하남백(河南伯)에 봉해졌다. 원나라 문종 지순 원년(1330)에 예국공(豫國公)으로 가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