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조육현(宋朝六賢)-3. 낙국공 정이(洛國公 程,頤 1033 - 1107)
동무배향(東무配享) 제2위(第2位)
북송 때의 저명한 학자로 '북송오자'중 한 사람이다. 자는 정숙(正叔)인데 세칭 '이천선생(伊川先生)'이라고 한다. 하남(河南)의 낙양 사람으로 송나라 인종 명도(明道) 2 년(1033)에 출생하여 휘종 대관(大觀) 원년(1107)에 졸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민하였고, 18세 때는 천자에게 상서하여 세속의 의견을 물리치고 왕도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 숭정전설서(崇政殿設書)등을 지냈고, 철종(哲宗) 때 간당(姦黨)으로 몰려 삭적(削籍)되고 부주(涪州)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송사(宋史)』 [도학열전(道學列傳)]에 의하면 그는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며 그의 학문은 성(誠)을 근본으로 하였고, 『대학』, 『맹자』, 『논어』, 『중용』을 표지로 삼았으면 육경에 통달하였고 행동거지가 과묵하였으며, 일단 성인(聖人)을 스승으로 삼으면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그 학(學)을 그만두지 않았다고 한다.
정치적으로는 사마광과 소옹의 입장에서 왕안석의 변법을 반대하고 '입종자법(立宗子法)'을 주장하였다. 철학 사상으로는 대체로 그의 형 정호와 같으나, 천리(天理)의 명백한 논술을 중시하고 이(理)를 핵심으로 하는 이학사상(理學思想)내에서 변증법 사상을 제기하여 사물의 발전, 변화의 원인은 사물 내부의 대립하는 쌍방의 상호 작용이라고 하였다. 인식론 상으로는 내심의 도덕 수양을 중시하여 거짓되지 않은 덕성의 지(知)를 강조하였으며 문견(聞見)의 지(知)를 반대하였다. 여기서 덕성(德性)의 지(知)는 실질적으로 천리인데, 그는 천리를 인식하고 덕성의 지를 얻는 방법은 격물(格物)이며, 격물은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인성론 상으로는 도심(道心)과 인심(人心), 그리고 천리(天理)와 인욕(人慾)의 대립을 강조하였고, 현(賢)과 우(愚)는 기(氣)의 청탁이 결정하는 것으로 봤다.
주요 저서로는 『역전(易傳)』, 『안자소호하학(顔子所好何學)』 등이 있으며, 후인들이 그와 정호의 저서를 합편한 『이정전서(二程全書)』와 『이정집』이 있다. 송 영종 가정 13년(1220)에 정공(正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이종 순우 원년(1241)에 문묘에 종사되었고 이양백(伊陽伯)에 봉해졌으며, 원 문종 지순 원년(1330)에는 낙국공(洛國公)으로 가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