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亂中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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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亂中日記)-121 난중일기 정유년(1597년) 7월 덧글 0 | 조회 673 | 2015-06-22 15:43:10
란공자  

난중일기(亂中日記)-121 난중일기 정유년(1597년) 7월

16일. 을사. 비가 오다 개다 하면서 끝내 흐리고 맑지 않았다. 아침 식사 후에 손응남(孫應男)을 중군 이덕필에게 보내어 수군의 사정을 알아보개 하였더니 돌아와서 중군에 대한 말을 전하기를 "좌병사의 긴급 보고를 보았더니 불리한 일이 많다"고 하면서 자세히 말하지  않더라고 하였다. 한탄스러운 일이다. 늦게 변의정(卞義禎)이란 사람이 수박 두 덩이를 가지고 왔는데 그 꼴이 형편없이 어리석고 용렬해 보였다. 궁벽한 촌에 사는 사람이 배우지 못하고 가난을 지켜서 형세상 그렇게 된 것이리라. 이 역히 소박하고 순후한 모습이다. 이날 낮에 이희남에게 칼을 갈게 했는데 매우 예리하여 적장의 맨머리를 벨 수 있을 것이다. 소나기가 급히 쏟아졌다.

 

아들 열이 떠나가는데 고될 것을 많이 걱정하여 침묵의 걱정이 그치지 않는다. 저녁에 영암군(靈巖) 송진면(松進面)에 사는 사노(私奴) 세남(世男)이 서생포에서 알몸으로 왔기에 연유를 물으니 "7월 4일에 전 병사의 우후가 타고 있던 배의 격군이 되어 5일에 칠천량에 이르러 정박하고 6일 옥포 들어왔다가 7일에는 날이 밝기 전에 말곶을 거쳐 다대포에 이르니 왜선 여덟 척이 머물러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여러 배들이 바로  돌격하려는데 왜인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뭍으로 올라가고 빈 배만 걸려 있어 우리 수군이 그것을 끌어 내어 불을 지르고 그길로 부산의 절영도 바깥바다로 향하였습니다.때마침 무려 천여 척의 적선을 만나 대마도에서 건너와서 서로 싸울 것을 헤아려 보니 왜선이 어지러이 흩어져 회피하므로 끝내 잡아 초멸할 수 없었습니다.제가 탄 배와 다른 배 여섯 척은 배를 제어하지 못하고 서생포 앞바다까지 표류하여 뭍으로 오르려고 할 즈음에 모두 살육을 당하고 저만 혼자 수풀 속으로 기어 들어가서 목숨을 건져 간신히 여기에 왔습니다"라고 했다. 듣고 보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믿는 바는 오직 수군에 있었는데 수군이 이와같으니 또다시 가망이 없을 것이다. 거듭 생각할수록 분하여 간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또 선장 이엽(李曄)이 왜적에게 뭍잡혔다니 더욱 통분하다. 손응남이 집으로 돌아갔다.

17일. 병오. 비가 간간이 내렸다. 아침에 이희남을 황 종사관에게 보내 세남의 말을 전했다. 늦게 초계 군수가 벽견산성(碧堅山城)에서 와서 만나고 돌아갔다. 송대립, 유황, 유홍(柳弘), 장득홍, 등이 와서 만나고 날이 저물어서 돌아갔다. 변대헌(卞大獻), 정운룡(鄭雲龍), 득룡(得龍), 구종(仇從) 등은 초계의 아전 들인데 어머니 족성(族姓)의 같은 파 사람으로 와서 만났다. 큰비가 종일 내렸다. 셩명을 적지 않은 고신(告身:임명장)을 신여길(申汝吉)이 바다 가운데서 잃어 버린일로 심문받으려 갔다. 경상 순변사가 그 기록을 가져갔다.

18일. 정미. 맑음. 새벽에 이덕필, 변홍달이 와서 전하기를 "16일 새벽에 수군이 기습을 받아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 및 여러 장수들이 다수의 피해를 입고 수군이 크게 패했다"는 것이었다. 듣자하니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얼마 뒤 원수 권률이 와서 말하되 "일이 미미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내가 직접 해안 지방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다"고 했더니 원수가 기뻐하기를 마지않았다. 나는 송대립, 유황, 윤선각, 방응원, 현응진, 임영립,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과 함께 길을 떠나 삼가현에 이르니 새로 부임한 수령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치겸(韓致謙)도 와서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19일. 무신. 종인 비가 내렸다. 오는 길에 단성(丹城)의 동산산성(東山山城)에 올라가 형세를 살펴보니 매우 험하여 적이 엿볼 수 없을 것이다. 그대로 단성현에서 유숙했다.

20일. 기유. 종일 비가 계속 내렸다. 아침에 권문임(權文任)의 조카 권이청(權以淸)이 와서 만나고 수령도 와서 만났다. 낮에 진주 정개산성(定介山城) 아래에 있는 장가 정자에 이르렀다. 진주 목사가 와서 만났다. 굴동(屈洞) 이희만(李希萬)의 집에서 잤다.

21일. 경술. 맑음. 일찍 떠나 곤양군(昆陽郡)에 이르니 군수 이천추(李天樞)가 고을에 있고 백성들은  대부분 농사에 힘써서 혹은 이른 벼를 거두기도 하고 혹은 밀보리 밭을 갈기도 했다. 점심을 먹은 뒤 노량에 이르니 거제 현령 안위와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 여남은 명이 와서 통곡하고 피해 나온 군사와 백성들도 울부짖으며 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상 수사 배설은 도망가 보이지 않았다. 우후 이의득이 패한 상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련서 말하되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방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올라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대장의 잘못을 말한 것을 입으로는 다 말할 수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거제의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 현령 안위와 사경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해 눈병을 얻었다.

22일. 신해. 맑음. 아침에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의 패망한 일을 많이 말했다. 식후에 남해 현감 박대남이 있는 곳에 이르니 병세가 거의 구할 수 엇게 되었다. 전마(戰馬)를 서로 바꾸자고 다시 이야기했다. 종 평세와 군사 한 명을 데려오겠다고 했다. 오후에 곤양에 이르러 몸이 불편하여 그대로 잤다.

23일. 임자. 비가 오다개다 했다. 아침에 노량에서부터 만든 공문을 송대립에게 주어 먼저 원수부(元帥府)에  보냈다. 뒤 따라 출발하여 곤양 십오리원(十五里院)에 이르니 배백기 홍립의 부인이 먼저 와 있었다. 말에서 내려 잠깐 쉬고 진주 운곡(雲谷)의 전에 유숙했던 곳에서 잤다. 백기도 와서 잤다.

24일. 계축. 비가 계속 내려 그치지 않았다. 한치겸, 이안인(李安仁)이 부찰사에게로 돌아갔다. 정씨의 종 예손(禮孫)이 손씨의 종과 함께 돌아갔다. 식후에 이홍훈(李弘勛)의 집으로 옮겼다. 방응원이 정개산성에서 와서 전하기를 "황 종사관이 산성에 와서 연해안의 사정을 보고 들은 대로 전했다"는 것이다. 군량 두 섬, 말먹이 콩 두섬과 말대갈(多曷) 일곱 벌을 가져왔다. 이날 저녁에 배 조방장 경남이 보러 왔기에 술을 내어 위로했다.

25일. 갑인. 늦게 갬. 황 종사관이 편지를 보내 문안했다. 조방장 김언공이 와서 마나고는 그길로 원수부로 갔다. 배수립이 와서 만나고 이곳 주인 이홍훈도 와서 만났다. 남해 현감 박대남이 그의 종 용산(龍山)을 보내어 내일 들어오겠다고 보고했다. 저녁에 배백기가 병이 난것을 가서보니 고통이 극도로 심했다. 매우 걱정되었다. 송득운을 황 종사관에게 보내어 문안했다.

26일. 을묘. 비가 오다 개다 했다. 일찍 밥을 먹고 정개산성 밑에 있는 송정(松亭) 아래로 가서 황 종사관 및 진주 목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해가 저물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27일. 병진. 종일 비가 내렸다. 이른 아침에 정개산성 건너편 손경례(孫景禮)의 집으로 옮겨 머물렀다. 늦게 동지(同知) 이천(李薦)과 판관 정제(鄭霽)가 체찰사에게서 와서 전령을 전달했다. 함께 저녁밥을 먹었다. 이 동지는 배 조방장에게 가서 잤다.

28일. 정사. 비가 내렸다. 이희량(李希良)이 와서 만났다. 초경에 동지 이천과 진주 목사 소촌찰방(召村察訪) 이시경(李蓍慶)이 와서 밤에 이야기하다가 삼경 후에 돌아갔다. 논한 일이 모두 계책하여 응전(應戰)한 일이었다.

29일. 무오. 비가 오다 개다 했다. 아침에 이 군거(李君擧:천) 영공과 함께 밥을 먹고는 그를 체찰사 앞으로 보냈다. 늦게 냇가로 나가 군사를 점검하고 말을 달렸는데 원수가 보낸 군사는 모두 말이 없고 활과 화살도 없어 쓸모가 없었다. 매우 한탄스러웠다. 저녁에 들어올 때 배 동지와 남해 현감 박대남을 만나 보았다. 밤 내내 큰비가 왔다. 찰방 이시경에게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