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10 21:12

석전의 의의 및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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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의 의의

 

 

석전이라 함은 문묘에서 공부자(孔夫子)에게 제사지내는 의식을 일컫는다. 즉 만세종사(萬世宗師)이신 공부자께서 남기신 인의도덕의 이상을 근본삼아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효제충신(孝悌忠信)의 실천과 수제치평(修齊治平)의 도리를 천명함에 있어 배사모성(拜師慕聖)의 예로서 생폐예제(牲幣醴齊)를 헌설(獻設)하고 공부자께서 자리에 앉아 계신 듯이 엄숙하고 경건하게 전례(奠禮)를 봉행하는 것을 석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원래는 문묘에서 선성(先聖), 선사(先師)에게 제사지내는 의식으로서 석(釋)과 전(奠)은 다 차려놓다는 뜻으로, 석채(釋菜)라 하면 빈번지류( 빈번之類)로 단조로운 차림이고, 석전은 생폐(牲幣)와 합악(合樂)과 헌수(獻酬)가 있는 성대한 제전(祭典)이다. 이러한 석전은 선성과 선현들의 학문과 인격과 덕행과 사상을 단순한 이론으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를 숭모하고 존중히 여기며 스승을 높이하고 진리를 소중히 여기는 기풍을 체득하기 위하여 문묘에서 거행하는 의식이다.

 

 

 

본래 문묘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설립한 태학(太學), 신라시대의 국학(國學), 고려시대의 국자감(國子監), 조선시대의 성균관(成均館) 등의 국립대학 구내에 건립하여 국조(國朝)에서 주관하는 오례(五禮) 중에서 길례(吉禮)편에 속하는 국가적 중사인 석전을 지내는 장소로 사용되어 왔다. 이러한 태학이나 국학, 국자감, 성균관은 우리 나라의 유일한 전통적 민족대학으로서 유교를 근본이념으로 하여 인재를 양성해 온 교육기관이다.

 

석전의 유래(由來)

 

석전이란 학교에서 선성(先聖), 선사(先師)에게 제사지내는 의식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선사(先師)란 앞서간 전대(前代)의 훌륭했던 스승들을 일컫는 말이고, 선성(先聖)이란 주대(周代)에는 요(堯)·순(舜)·우(禹)·탕(湯)·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을 일컫는 것이 고대 중국의 관례이고, 한(漢) 이후 유교를 국교로 받들게 되자 공부자를 점차 선성, 선사의 자리로 올려 문묘의 주향(主享)으로 모시는 동시에 석전으로 우러르는 관례가 정착이 되었다.

 

후한(後漢) 명제(明帝) 같은 제왕은 주공(周公)을 선성, 공부자를 선사로 삼아 공부자의 고택(古宅)을 찾아가서 석전을 올리기도 하였다. 위(魏), 수(隋), 당(唐) 이후로는 대체로 공부자를 선성, 안회(顔回)를 선사로 받들어 석전을 올렸다.

 

특히 당 태종 정관(貞觀) 4년(630년)에는 각 주(州)의 현(縣)마다 공부자묘(孔夫子廟)를 세웠는데 당 현종(玄宗)이 개원 27년(736년)에 공부자를 문선왕(文宣王)으로 추봉하였다. 공부자께서 돌아가신 후 그의 옛집 곡부(曲阜)에 묘(廟)를 세우고 후제(後齊)에 이르러 태학의 가운데에 공안(孔顔)의 묘(廟)를 두었다. 명(明)에 와서 태학의 문묘를 대성전이라 일컬어 석전을 올리는 사당으로 확립되었다.

 

우리 나라에 유교가 전래한 기록은 없지만 최초로 태학을 설립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인 서기 372년으로 이때 석전도 함께 봉행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백제는 국립 중앙학교 설립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오경박사(五經博士) 등의 명칭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고,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박사 아직기(阿直岐), 왕인(王仁)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국립 중앙학교도 석전의식을 봉행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신라에서는 진덕여왕(眞德女王) 2년인 서기 648년에 김춘추가 당나라에 건너가 그곳의 국학(國學)을 찾아 석전의 의식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 국학설립을 추진했고 신문왕(神文王) 2년에 그 제도가 확립되었다. 성덕왕(聖德王) 16년(717년)에는 태감(太監) 김수충(金守忠)이 당으로부터 공부자와 10철 및 72제자의 영정을 가져와서 국학에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어 석전의식이 국학에서 봉행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고려에서는 『고려사(高麗史)』에 보면 국자감에서 석전례를 행한 것을 볼 수 있으며 성종(成宗) 2년(983년) 박사 임성로(任成老)가 송으로부터 공부자묘도(孔夫子廟圖) 한 폭과 제기도(祭器圖) 1권, 72현찬기(賢贊記) 1권을 각각 가져와 성종에게 올렸으며 현종(顯宗) 11년(1020년) 8월, 최치원을 선성묘에 배향하고 같은 13년(1022년)에는 설총을 또한 이 묘에 배향하였다. 예종(睿宗) 9년(1114년) 6월에 사신 안직승이 귀국할 때 송휘종(宋徽宗)이 신악기와 악보 및 지결도(指訣圖)를 보내 주었다.

 

이 때 보내준 악기는 속악기와 아악기가 혼합하여 있었다. 이 악기를 받을 하례사(賀禮使)로 추밀원(樞密院) 지주(知奏) 왕자지(王子之)와 호부(戶部) 미중(微中) 문공미(文公美)를 파견하였다.

 

예종 11년(1116년) 6월에 송에 하례사로 가 있던 왕자지, 문공미에게 휘종이 조서(詔書)와 함께 대성아악(大成雅樂)을 보내 주었다. 이 때에 들어온 대성아악은 순수한 아악기에 속하며 이와 함께 아악 연주에 필요한 무구(舞具), 무복(舞服) 장식 일습을 구비하여 보내온 것이다.

 

이 때 들어온 대성아악은 원구(圓丘)·사직(社稷)·태묘(太廟)·선농(先農)·선잠(先蠶)·문선왕묘 등의 제사와 그밖의 연향에 쓰이게 되었다. 충렬왕 30년(1304년) 6월에 고려의 국도 개경에 있던 국자감을 성균관으로 개칭하였는데 성균관이라고 하는 이름은 "一掌成均之法典 以治建國之學政"이라는 『주례(周禮)』의 성균에서 연원된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태조(太祖) 7년(1398년), 숭교방(崇敎坊)에 성균관을 설치해 국립 최고학부의 기능을 다하게 했으며, 정전(正殿)인 대성전에는 공부자를 비롯해서 4성, 10철과 송조6현 등 21위를 봉안했고, 동·서무에 우리 나라 명현 18위와 중국 유현 94위 등 모두 112위를 봉안하여 매년 춘추 두 차례 석전을 받들어 행하였다.

 

그러나 일제치하인 1937년부터는 양력 4월과 10월의 15일로 변경하여 실시하다가 해방 후인 1949년에 전국 유림대회의 결의로 5성위(五聖位)와 송조2현(宋朝二賢)만 봉안하고 그 외 중국 유현 113위(啓聖祠 5위 포함)를 매안(埋安)하고 우리 나라 18현을 대성전에 승봉종향(陞奉從享)하고 춘추석전을 폐하고 탄일(誕日)인 음력 8월 27일에 기념석전을 봉행하다가 3년 뒤인 1953년에 공문십철(孔門十哲)과 송조육현(宋朝六賢)을 복위(復位)하고 석전도 봄과 가을 두 차례 즉,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로 환원하여 봉행하였다.

 

그러나 중국·일본·대만·베트남 등 전세계적인 조류에 발맞춰, 임원 및 전교회의에서 설문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중앙상무회의에서 결의하여 2007년부터 공부자(孔夫子)의 기신일(忌辰日)을 양력(陽歷)으로 환산한 5월 11일에 춘기석전(春期釋奠)을 봉행하고, 탄강일(誕降日)을 양력으로 환산한 9월 28일에 추기석전(秋期釋奠)을 봉행해 왔으나 서정기  관장이 부임한 후로 다시 2 8상정일로 봉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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